올해 7월엔 드디어 서울 퀴어 퍼레이드를 갔다 왔습니다. 그동안은 일이 바빠서, 교대근무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안 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 회사를 이직한 올해 7월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투사가 될 수 없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논바이너리 부치 에이엄”

이 단어들의 집합 자체가 낯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바이너리는 젠더가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라벨링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부치는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통상적으로 레즈비언 관계에서 관계를 주도하는 사람, 그러니까 조금 유머러스하고 납작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남자 같은 레즈비언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이엄은 에이엄브렐라 그러니까 무성애, 무연정 범주에 있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라벨링을 오랫동안 잊었다고 한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가 이제는 말할 수 있겠다 싶어 적어봅니다. 라벨링이 가지는 용이성은 누군가에게 나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붙인 라벨들은 오히려 오해나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그동안 소개나 설명에 있어서 크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도 같이 해보려고 합니다.

어떤 라벨에는 그 라벨이 가지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게이 라는 라벨은 엄청 남성적이고 근육질거나 엄청 끼를 부리거나 성적으로 문란할 거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습니다. 레즈라는 라벨에는 숏컷이거나 셔츠 같은 옷들을 입거나 센스가 좋지 못하다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논바이너리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은 어떤 걸까요?

논바이너리의 스테레오 타입은 남성의 평균 정도 키인 170에 마르고, 성별이 크게 드러나지 않은 옷들 예를 들어 셔츠에 바지, 유니섹스 표현을 고집할 거란 스테레오 타입이 있습니다. 스테레오 타입은 물론 스테레오 타입일 뿐 그 라벨 전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라벨의 용이성을 생각해볼 때 실제로 스테레오 타입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 라벨은 큰 효용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라벨을 연기한다는 오해를 살 여지가 다분합니다. 물론 당사자들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사용되는 것은 조금 다른 맥락입니다. 물론 제가 봤던 논바이너리들은 다들 인문, 컴퓨터 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유니섹스적인 표현이나 성별 파괴적인 표현들을 즐겨했긴 헀죠, 역시 논바이너리 스테레오 타입에 공감하기 어려운 문제는 170 정도에 마른 몸에 있습니다. 제가 그런 몸을 가진 사람이냐? 라고 했을 때 당연히 아니었고, 어떤 그런 모호성에 대해서 납득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에 크게 드러내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의학적 조치로 그런 모호성을 만들지 않아야겠냐.? 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기도 했구요.

제게 부치가 가지는 의의는 헤테로 남성과 다른 결로 여성애를 한다에 있습니다. 꽤나 유명한 퀴어계 농담 중에 하나는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부치만이 여자를 사랑하지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치를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마치 부치란 누군가가 님 부치네요 라고 불러줄 때 공인 받는 것도 있지만, 그 관계성이 모호함에도 있습니다. 상대성 부치 이론이라고 부치는 더 부치 같은 부치 앞에서 펨이 된다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부치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부치에 공통적인 속성으로는 가오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내 애인을 위해 별을 따오기 위해 고생했지만, 뭐 많은 일이 있었다. 정도로 이야기하는 느낌이겠지요. 그렇다면 나에게 여성애는 어떻게 헤테로 남성의 여성애와 다른 결을 가질까? 헤테로 남성이 가지는 여성애는 사회적 관습을 상대적으로 많이 답습합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관습은 집안 어른을 남자로 모시며, 연애의 관계성에서도 제법 많이 드러난다며, 매력포인트로 삼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대기업과 공기업에 다니는 능력 좋고 집을 먹여 살리는 남자 정도가 있겠네요. 본질적으로 헤테로 남성의 여성애는 ‘내 아를 낳아됴’ 로 아주 거칠게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험적으로 연애를 하는 이유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고,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대를 잇기 위해서다 라는 어떤 보편적이고 관습적인 생각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부치라고 라벨링 했던 이유는 이와 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래 부치라는 라벨은 의학적인 호르몬 치료 과정 중에 붙였던 라벨입니다. 하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그만 둔 지금도 여전히 부치 라벨을 붙인 이유는 제가 추구하는 여성애의 근본은 아름다움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애자의 정의는 여성 혹은 여성성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참 오래전부터 고민하던 지점이었는데 여성성이란 사회에서 만든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꽤나 옳지 못한 행위가 아니냐 라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 고민을 친구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 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남자 캐릭터가 많지는 않지만 그 중에 하나를 꼽자면 닌텐도 스위치 게임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의 링크가 있습니다. 링크의 외모적 특성으로는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지만, 제가 다른 남자 캐릭터와 비교해서 크게 달랐던 점은 피부 관리가 잘 되어 있고, 머리가 제법 잘 관리된 단발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근육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정말 정형적인 미소년의 모습의 표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젤다가 어떤 피부적 트러블을 가지고 있거나, 근육을 잘 드러내는 복장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취향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걸 깨달고 나니 여성성이란 아름다움이며 이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젊음의 지향을 이야기 한다 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트랜스 여성이나 여자 캐릭터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잘 많이 투자 하는게 피부 관리이고 베이스 화장이구나 라고 한다면 굉장히 재밌는 설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여성애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인가? 라고 물어보았을 때 여자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밝은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과하게 여자에 미친 사람이라고 다들 그러겠죠. 하지만 여성은 인간의 기본형입니다. 공학적으로 기본형에서 변형으로 가는 것은 쉬운 방면 변형에서 기본형으로 가는 건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트랜스 남성의 경우 남성 표현이 쉬운 방면 트랜스 여성은 여성 표현이 어려운 편입니다. 남성호르몬을 복용하면 수염이나 목소리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여성호르몬의 복용으로 생기는 지방 재배치와 몸매의 변화보다 빠릅니다. 어쨌든 헤테로 남성과는 미묘한 결이 있고, 전 이걸 부치 레즈비언들에게 비슷한 결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 부치 라는 라벨을 붙였습니다.

에이엄브렐라는 무성애, 무연정 범주에 드는 사람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저에게 애인은 관리자 권한을 가진 사람입니다. 한 명은 하나의 우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우주의 면모를 보여줄 때, 제 이야기를 할 때 지인에게는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를, 친구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느낌이다를, 절친에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인 것 같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애인에게는 더 많은 맥락과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감정을 100 % 의 강도로 느끼기 어려워 하는 사람이라 그런 것들을 말로 잘 설명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편인이라서 저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 최대한 설명하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누군가는 애인은 관리자 권한을 가진 유저다 라는 비유를 보고 낭만적이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들은 윈도우즈와 다르게 관리자 권한을 가진 유저가 시스템을 고의적으로든 실수로든 파괴할 수 있으며, 이런 부분들은 주종관계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합니다. 에이엄브렐라라고 붙인 이유는 로맨틱한 사랑, 설렘이 여전히 무엇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섹슈얼함을 느끼는 것이 섹슈얼적 지향이고, 누군가에게 로맨틱함을 느끼는 것이 로맨틱적 지향 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그러한가 라고 했을 때 나에게 사랑은 그거와는 다른 결의 무엇이구나 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연애에 있어서 애인에게 하는 행동들은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배운 것들이라고 생각을 하는 편인데 섹슈얼한 끌림.? 로맨틱한 끌림.? 이라고 하면 공감하기 어려운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삶에서 연애 같은 것들이 없었냐 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삶에서 이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는 감정은 있었고, 그래서 나에게는 절친과 애인의 경계가 뭔지 찾다보니 관리자 권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말로 조금 더 풀어쓰자면 나에게 애인은 나의 굉장히 많은 것,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가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만 그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로맨틱하고 섹슈얼한 정열적이고 뜨거운 종류의 사랑이냐라고 했을 때 그건 아니다 정도의 느낌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어떤 감각인지 알기 전까지는 제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의 검은 반지를 (무성애자의 상징 중 하나 이다.) 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설명이 길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퀴어퍼레이드를 다시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투사 이야기를 했을까요? 퀴어퍼레이드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연대의 경험이고, 투쟁의 경험이며, 세상에 외치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들이 주는 황홀감은 잊기 힘든 기억 중에 하나 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설명으로 미루어보아 꽤나 모호한 사람입니다. 그 모호함 속에서 이렇게까지 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그동안의 치열한 고민들과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퀴어를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퀴어퍼레이드를 하는 경험은 꽤나 황홀하지만 아시다시피 퀴어에는 여러 라벨링이 있고, 수면 아래에서는 그 라벨링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든 어떤 단체적으로든 말이에요. 전 그런 일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질렸으며 동시에 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명확함이 필요합니다. 명확한 비전, 명확한 믿음, 명확한 투쟁 하지만 제가 살아보니 세상에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명확한 일이라는 게 많지 않았으며, 명확함이라는 건 명확하게 믿기 때문에 명확해진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투사라면 갖춰야할 행동력, 기깔나는 글솜씨, 말솜씨 이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활동가가 된다는 건 투사가 되어 삶을 모두 사회 운동에 쏟아붓는 용기나 믿음, 명확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제 주변의 많은 분들은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고, 동시에 퀴어계 내부에서의 많은 다툼도 보았던 사람이라서 더는 퀴어퍼레이드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번에 간 것도 살면서 한 번은 그런 명시적인 연대와 환호의 경험이 궁금하다 해서 간 거니까요.

삶은 무척이나 복잡하며 한 명의 사람은 하나의 삶과 우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생각하는 나의 대해서 최대한 깊게 슬라이스하고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메일이 길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논바이너리 부치 에이엄 이라는 라벨을 예전처럼 의식하고 살지는 알겠지만 이제는 누군가 깊게 물어본다면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들 가을과 초겨울을 잘 보내시길 바라며 이번 달 메일을 마무리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