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생각이 많을 때는 때론 쏟아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 생각에 따라 이 블로그와 다른 블로그에 적절히 올릴려고 한다. 원래 이 블로그는 기술 블로그로 운영될 예정이었으나 아직은 아는 것이 많이 없어 이렇게 생각과 병행해서 적절히 올리는 메인 블로그가 되었고, 다른 블로그는 좀 더 심연에 가까운 느낌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늘은 연애적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제서야 비로소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지금 꺼내기에 더나위할 일 없이 적절한 주제일 것이다. 먼저 나는 논바이너리라고 라벨을 붙이고 있다. 그 특성 상 라벨을 크게 생각하지는 않으나, 어쨌든 사회적으로 어떤 성별로든 보여지고 사는 입장에서 모호하거나 불편한 지점은 존재하는 것이다. 일단은 여성애자라고 라벨을 붙이고 있다. 여성애자는 여성적임을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이 이야기의 근본은 여기서 출발한다.

욕구는 욕망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성욕과 성적 지향은 무척이나 다르다. 지향은 방향이 필요하다. 욕망은 성적 지향처럼 방향성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욕망의 무엇이 문제인 건가요? 첫 번째로는 욕망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가 있다. 욕망은 어쨌든 방향이라는 특성 상 받는 사람에게 불쾌하거나 어색함을 연출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첫 번째의 연장으로 그것이 꼭 여자여야하는가? 라는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자신이 논바이너리라고 정체화를 하여도, 단순히 여성성을 지향하거나 여성으로 보인다고 하여 내가 욕망하는 것에 대해 정당한가?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세 번째로는 그렇다면 내가 연애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고, 왜 하고 싶은가? 그러니까 무엇을 욕망하는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건 쏟아내는 글이고, 크게 퇴고를 거치지 않았으며, 20대 초반에 이미 비슷한 고민에 대한 친구의 친구의 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존재한다. 였고 여전히 그 답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적는 이유는 좀 더 나에 대한 고민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더불어 관련 분야에 대해 지식이 부족하여, 크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음에 양해를 구한다.

욕망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일단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욕구가 아닌 욕망은 방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방향에 대해서는 적어도 설명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100 퍼센트 원활하게 설명을 한다던지, 납득을 시키는 게 불가능할지라도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욕망할 때 어떤 이유에서 욕망하는지 라던가, 그런 것에 이유가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외로워서 라던지, 자해적인 이유라던지, (실제로 꽤나 많은 케이스들이 존재한다.) 아니면 존경한다던지 등의 수많은 이유가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전부 설명이 가능하냐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사람에게 한 가지 면만 있지 않은데 어찌 전부 설명이 가능한가? 하지만 주요한 이유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조금 다른 맥락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흔히 칩이라고 표현하는데 어떤 것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 돈, 체력, 에너지 등을 통틀어서 칩이라고 부른다. 욕망은 방향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칩이 필요하다. 그 칩을 소모함에 있어서 누구든지 그에 맞는 이유는 당시에 알든 알지 못하든 존재하지 않겠냐, 그것을 단순히 좋아해서 라고 뭉뚱그리기엔 스스로에게는 조금은 부족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역시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이 나에게 꼭 여자여야하는가?

욕망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러니까 내가 칩을 쏟는 것에 대해 적어도 어떤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 대상이 하필 그 사람이었나도 설명이 가능하지 않겠냐 에서 출발한 질문이었다. 그럼 이 질문이 나온 맥락에 대한 설명도 필요할 것이다. 어쨰서 여자여야하는가? 이것은 내 라벨이 ‘논바이너리 여성애자’ 라는 것과 사회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시스헤테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한 질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왜 ‘논바이너리 여성애자’ 라고 라벨을 붙였는가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는 질문이자,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단순히 좋아하니까로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니까 말이다.

연애적 욕망을 일단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욕망에 대해 설명해야할 것이다. 내가 욕망하는 사람은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을 좋아한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 사람의 사고회로, INPUT 에 대한 OUTPUT 과 그 도출 과정을 좋아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표현에 있어서 어느 정도 기술이 필요하다. 일련의 과정들은 필연적으로 치열한 자기 고민을 수반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의 논리회로를 깨달기 무척이나 어렵기 떄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사람을 존경하는가? 단순히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와 더불어, 누군가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재밌고, 삶에 있어서 많은 영감을 주고, 내 삶에 있어서 적용할 수 있는 부분들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이라는 객체 또한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는 편인데,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유지보수와 업그레이드를 필요로 한다. 그 부분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내가 그런 도움 등을 필요로 할 때 잘 정리해서 표현하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삶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고, 단순히 어떤 부분이라고 특정하긴 어렵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이런 사람의 이런 면이,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이 사람의 이런 면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을 모두 존경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연애적 욕망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그러니까 이것이 여성성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왜 연애적 욕망으로 발전하는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여자는 귀엽고 예쁘고 멋지잖아요! 이상의 내가 생각하는 여성성에 대해 설명해야할 것이다. 나의 삶의 역사에 있어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지켜봤을 때는 관찰되었던 것은 수동적임이나 완벽성과 거기서 비롯되는 과한 부하였다. 하지만 이것들은 내가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와는 무척이나 멀었으며, 주로 이것을 요구하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 염증을 느꼈다. 동시에 그렇게 살지 않는 적지 않은 여성들을 보았고, 그들을 존경하고, 삶에 있어서 진심으로 같이 함께 가면 재밌겠다 라는 욕망이 연애적 욕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통계치를 뽑아볼 때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여성성을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성을 수행한다는 뜻은 흔히 이야기하는 수동적이고, 흔히 집안을 위한다와는 당연히 거리가 멀다. 성별은 스펙트럼임에도 사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간극에서 오는 오해를 부르기 좋은 표현임에 양해를 부탁한다. 이것은 여성적 사회 표현을 하기로 결정한 사람을 의미한다. 어쩌면 그들은 트랜스 여성일 수도 있고, 여성화 되는 트랜지션을 받는 논바이너리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정말 외성기가 아닌 내성기를 가지고 태어나 여성이라고 자신의 라벨을 붙이며 살아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성기를 가지고 자신의 지정된 성별로 사는 논바이너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젠더로 살아가냐보다는 여성적 표현에서 오는 많은 것들에 저항과 삶의 역사, 표현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건 왜 전형적인 논바이너리 캐릭터들은 170 cm (상당히 중성적으로 보이는 키이다.)에 여성으로 지정되어 있고, 마른 사람이 되었는가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연애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욕망하는가?

그렇다면 연애에서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서로가 삶의 동반자였으면 좋겠다. 서로가 삶의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필연적으로 사람은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라는 이유를 들 수도 있고, 사회적 동물이기에 라는 이유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필요로 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친구면 괜찮을 거라고 할 거고, 누군가는 애인이나 반려자가 꼭 필요하다고 할 것이며,, 누군가는 회사 사람으로도 괜찮다고 할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나에게는 애인이자 삶의 동반자인가? 나는 타이틀의 힘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 전공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친구는 삶의 일부분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한국의 기준으로에 따라 나이 등에 따라 결정된다기 보다는 회사나 이득관계가 아니면서, 나의 삶의 일부분을 나눌 수 있을만큼 편안하고, 존경하고, 삶의 역사나 생각이 궁금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애인은 삶의 대부분의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친구에게는 맥락에 따라 조금 더 설명할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애인이라면, 삶의 동반자라면, 삶의 많은 것들을 나눌만큼 서로 신뢰가 있고, 그래서 그 사람의 조언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 나는 안타깝게도 직접 겪거나 누군가 내가 납득이 갈 때까지 설명해주지 않으면 조언을 수용하기 어렵다. 그것은 고집이 꽤나 세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한국에서 비정형적인 삶을 살아온 내가 살아온 원동력이자 어떤 벽이 된다. 이것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에 친구에게 요구하기엔 무거운 요구이다. 하지만 또 삶의 동반자는 다른거니까, 그래서 이렇게 무거운 라벨을 붙이거니까,, 어쩌면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랑에 있어서 꽤나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기준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에도 그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진심으로 헌신할 것이다. 너무 욕심인가 싶다가도 어차피 욕심을 적는 글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적자면, 내 친구들에게 소개 시켜주고, 같이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꼬질했던 시절을 보고 겪었던 친구들이 단순히 연애 등을 한다는 이유로 멀어지는 것은 무척이나 싫은 일이다. 물론 반대로 내가 애인의 친구를 보는 것 등이 부담스럽다면,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애인보다는 삶의 동반자라는 표현이 조금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마치며

꽤나 거창한 주제로 거창하게 적었다. 단순히 애인이 내가 무언가 제시했을 때 맘편하게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를 이렇게 길게 써보았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내 지향점에 대해서는 내가 확실히 정리할 수 있는 글이었다. 동시에 필연적으로 꼬질한 부분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글이었다. 만족스러운 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적어도 뿌듯하다. 이렇게 글로 정리하기까지 꽤나 많은 것들이 필요했으므로

이번 학기에 들었던 과목 중에 하나가 세상 읽기와 논술인데 제법 도움이 된 것 같다. 계속 논리적인 부분을 연결하는 것은 확실히 다양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런 류의 글을 계속 적다보면, 더 우아하고 치열하게 잘 적을 수 있겠지. 좋은 글은 글의 주장과 별개로 상쾌한 기분이 든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과 이런 고민들을 풀기 위한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종종 이런 느낌의 글들도 써보고 만족스럽거나 공개해야겠다고 느끼는 것들은 포스팅 해보도록 해야겠다. 그러려면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겠지. 안전한 유머는 치열한 고민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좋은 글과 재밌는 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잘 해봐야지, 삶이 그러하듯, 글 또한

그리고 언제나 내 친구들에게 느슨한 연대와 환대에 항상 감사합니다.